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둘째를 갖는 것은 내 용기의 무게를 놓고 매일 심판대에 서는 것이다.

첫째를 학교에 보내고 둘째와 어린이집 쪽으로 오는 길

"오늘 왜 이리 기운이 없어요?"하며 첫째 친구 엄마가 묻는다.

"어...... 어제 애들이랑 싸웠는데 마음이 빨리 풀리지 않고 힘드네요. 하하"

"아 그냥 오늘은 맛있는 거 먹고 책 읽고 그래요. 저도 맨날 그래요~"

울컥하고 눈시울이 빨개졌다.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엄마들이 그렇다는 짐작과 함께 위로가 됐다. 

 

 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부터 꼭 교문까지 같이 가서 들어가는 거 보고 발길을 돌린다. '내년이면 이렇게 못 할 것, 할 수 있을 때 후회 없이 하자.' 했던 게 둘째가 보채기 시작하면서 못하는 경우가 늘어났다. 그때마다 나 자신과 약속을 못 지킨 것 같아서 내심 못마땅하고 불편했다. 첫째에게 미안함이 생긴다. 첫째를 보내면 둘째는 모닝 코스가 있다. 무인 문구점을 다녀와서 파리바게트에서 군것질을 하고 어린이집 앞에서 새들에게 인사하고 들어가는 것. 오늘도 그 코스대로 지나오는데 둘째는 하고 싶다는 거 다 해주는데 첫째한테는 못 해주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.

 유난히 첫째와 둘째의 요구사항이 엇갈리는 날이 있다. 어제가 그랬다. 하원하고 첫째를 데리러 갈 때 놀이터에서 더 놀고싶지만 안 됐고 첫째는 저 가게에 가보고 싶은데 둘째가 있어서 안 되고 저녁에 다시 오자 약속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하루. 혼자였으면 내가 피곤한 거 참고해줄 수도 있었던 일인데 둘이니까 선택의 기로에 선다. 차례대로 요구를 들어줄지, 경중에 따라 요구를 들어줄지, 옳은 게 뭘까? 이 상황에서 난 이런 결정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엄마, 첫째, 둘째 모두 불만족이면? 언제까지?

 

 주변에 둘째를 준비하는 엄마들이 묻는다. "둘째를 키우는 거는 어때요?" 라고. 사실 적당한 대답을 찾는 게 어렵다. 첫째에게 줄 사랑을 쪼개서 둘째에게 줘야 한다는 죄책과 반감에 둘째를 꺼려했던 나는 "예상보다 힘들어요."라고 말끝을 흐리고 만다. 더욱이나 얼마 전 읽었던 '마음이 흔들려서, 마흔일걸 알았다.'는 책에서 외동들이 크게 외롭다고 느끼지 않고 사회성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부분을 읽었을 때는 잠깐 나 선택을 곱씹어봤다.

 

 나는 선택을 했고 둘째를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내 스스로 용기를 내고 내가 내린 결정을 응원했다. 그리고 감사했다.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적어도 나에겐 매일매일이 용기의 한계에대한 도전이고 싸움이다. 선택하고 후회하고 좌절하고 방법을 찾고 극복한다. 그 과정 속에서 사랑을 주고받아 더 성장한다. 나는 일 년 전보다 사랑의 크기가 성장했다고 믿는다. 밥그릇 정도의 사랑이었다면 두 아이를 통해서 욕조 정도의 사랑을 키웠다랄까. 수영장 정도 사랑을 더 키워야겠다. 넘치고 넘치게. 복직하면 못 해줄 것을 생각하지말고 지금 아이와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자. 사랑을 주자. 내 용기를 시험하자.